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터 모델 (문단 편집) === 독소전쟁 말기 === >모델 원수가 중부집단군 사령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병들이 자신감을 되찾았다. >---- >1944년 6월 28일, 9군 사령부 전쟁 일지 >나의 최고의 야전원수(mein bester Feldmarschall). 귀관이 아니었다면, 귀관의 영웅적인 노력과 탁월한 통솔력이 없었다면 소련군은 이미 [[동프로이센]]에 도달했거나 심지어 베를린의 관문 앞에 와 있었을 것이다. 독일 국민은 조국을 위한 귀관의 헌신에 감사하고 있다. >---- >1944년 8월, [[아돌프 히틀러]]. 동부전선을 재건한 중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의 무훈을 거듭 치하하며 1944년 1월, 갑작스레 늑대굴로 호출되어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모델은 긴급히 방어선을 재편성했고, 특히 '''방패와 검(Schild und Schwert) 작전'''을 입안하여 총통의 승인을 받았다. 특이한 것은 그동안 히틀러 앞에서 '''후퇴'''라는 단어를 꺼내면 모조리 해임당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모델은 작전안에 후퇴를 가능한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물러서서 전력을 추스르다가 적의 허점이 보이면 그대로 공세로 전환하여 재점거한다는 적극적인 전법임을 강조하여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냈다. 무엇보다 모델의 북부집단군 사령관 부임 이후 첫 번째 명령은 16군 예하 사단의 공병 부대들을 차출하여 판터 라인을 제대로 된 방어 진지로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번에도 OKH의 쿠르트 차이츨러 참모총장과 히틀러에게 '''들키지 않고''' 진행해야 했다. 덕분에 독일 북부집단군은 소련군에 5배가 넘는 피해를 안기며 무사히 퇴각, 판터 라인에 도착하여 [[레닌그라드 공방전|레닌그라드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었고 1944년 3월 이 공적으로 모델은 [[원수(계급)|원수]]로 진급했다. [[파일:attachment/발터 모델/Walter_Model_Josef_Harpe_Erhard_Raus_1944.jpg]] ||좌: 1944년 1월, 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을 앞둔 모델이 오랜만에 9군을 방문하여 후임 사령관이었던 요제프 하르페(Josef Harpe)와 함께/ 우: 1944년 4월,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Walter Model) 원수와 휘하의 4기갑군 사령관 [[에르하르트 라우스]](Erhard Raus). 53번째 생일을 이들 9군 장교들과 함께 보낼 만큼 모델과 9군의 전우애는 각별했다.|| 1944년 3월 말,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전략적인 후퇴를 받아들이지 않는 히틀러에 의해 파면되고, 후임자로 모델이 임명되면서 남부집단군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 1944년 6월 22일 소련의 하계 대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되었는데, 이 공세는 독일군의 예상과는 달리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아니라 중부집단군을 겨눈 것이었다. 공세 개시 7일이 지난 6월 28일, 중부집단군 사령관인 [[에른스트 부슈]] 원수가 해임되고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인 모델이 겸직하게 되었다. 모델이 중부집단군 사령관이 임명되었을 때 중부집단군 예하 3개 야전군의 사단 대부분이 이미 포위되었거나 포위될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모델은 중부집단군 사령관직까지 겸임하며 실질적으로 혼자서 독일군의 동부전선을 책임지다시피 했다. 당시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부대의 전체 인원이 1명뿐인 경우나 장비와 보급품은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전선이 사라지고 거대한 구멍(More Hole Than Front)이 생겨난 지옥 같은 상황에서 쉴새없이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델은 그렇게 무너지던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체계적인 군대로 재편성했고, 어떻게든 전열을 유지한 채 퇴각하며 엷은 방어선을 거듭 만들어냈다. 특히 소련군의 진격 한계점을 포착하여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근교에서 특유의 파쇄 공격으로 알렉세이 라드집스키(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адзиевский)의 제2근위전차군을 궤멸시키고, 소련군을 50km나 후퇴시키며 다시금 견고한 전선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었다. 이 공적으로 모델은 제3제국 최고의 훈장인 다이아몬드 곡엽검 기사 철십자장을 받으며 '''동부 전선의 수호자'''(Retter der Ostfront)라는 별명까지 갖게 되었다. 독일의 중부집단군을 궤멸시킨 바그라티온 작전의 대성공 당시 소련군 수뇌부는 1944년 안에 [[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또한 영•미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독일 공군의 지원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소련군 대 독일군의 전력비가 5:1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등 유능한 장성들이 한꺼번에 해임되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독일 군부의 근간마저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홀로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지켜낸 발터 모델의 수완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회고록에서 >'''"이토록 어려운 동부전선 중앙의 상황에서 모델 원수는 전선 재건의 임무를 맡을 수 있는 최상의 인물이었으며, 오직 자신의 용맹함으로 이를 해냈다."''' 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모델이 재건한 방어선은 그의 서부전선 전임 이후 [[육군참모총장]]인 구데리안이 동부전선 방어 전략의 요충지로서 활용하게 된다. 후대의 전사학자들도 동부전선을 재구축한 발터 모델에 대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자'''(Miracle Work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리델 하트]]는 >'''"전역에서 예비 부대를 만들어 내어 전선을 재건하는 경이로운 재능"''' 이라고 기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